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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장례 문화

장례

by 토니모니 2023. 5. 27.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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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장례 문화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문무왕

통일신라시대에는 토장(土葬)을 위주로 하던 우리나라에 불교의 영향으로 다비제가 성행한다. 대표적인 예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文武王, 661~680)이다. 문무왕은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사책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인력을 수고로이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임종 후 열흘이 되면 왕궁 밖 뜰에서 불로 태워 장사 지내고 상복을 입는 경중이야 규례가 있을 터이나 장례 절차는 힘써 검약하게 하라."라고 했다. 그래서 그의 유언대로 "법류사 남쪽에서 불사르고 유골은 동해에 뿌렸다."라고 옛 문헌은 전한다. 즉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가운데 대석상(大石上)에 불교식 장법에 따라 장사 지냈다는 것이다. 이곳은 지금도 대왕바위라 하여 장골(藏骨)한 흔적이 남아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문무왕이 왕의 신분으로서 화장을 단행한 뜻은 완전한 국가의 통일을 위하여 신라에 자주 침략하는 왜구를 격퇴할 동해의 용이 되겠다는 소망과 군왕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능묘(陵墓)에 대한 비판에서 몸소 검약한 불교식 장법을 택한 것이다. 

신라시대 화장 장례 문화

신라시대에는 문무왕뿐 아니라 많은 왕들과 승려들이 화장을 하였다. 그러나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불교식 장법이 광범위하게 퍼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왕실이나 귀족 외에 일반 상민들이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현재까지는 없기 때문이다. 단지 후대에도 농어촌에는 풍장(風葬)이나 야장(野葬), 초분(草墳) 등의 이중장(二重葬)이 존속했던 것으로 보아 일반 상민들의 경우 전통적인 장례풍습을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또 많은 골호(骨壺)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장을 한 후 뼈를 항아리에 담아 묻는 매장법이 유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골호들은 지하의 얕은 깊이에 아무 구조 없이 발견되기도 하고, 두껍고 큰 항아리 속에 골호를 넣은 것도 있으며, 석실묘의 내부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

신라시대 무덤의 크기 변화

신라에서는 통일 전후를 경계로 하여, 무덤들이 종래의 평지로부터 분지 주변의 구릉지대로 옮겨가며 거대한 적석목곽 봉토분들은 점점 축소되어 소형화되고 간편한 석실묘로 바뀌어 간다. 석실의 크기는 대체로 가로 세로 각각 3m이며, 높이는 4m로 위로 올라갈수록 좁혀 지다가 그 꼭대기에 이르러 한 장의 판석으로 덮인 것이다. 현실 바닥의 중앙에는 캐낸 돌로 쌓은 높이 70cm의 2인용 관대가 마련되어 있어 합장묘로 밝혀지기도 하는데, 관 받침의 윗면에 사람 모습을 새겨놓아 시신을 누이도록 한 것이었다. 이러한 석실묘는 벽면에 회칠을 한 것이 보통인데, 그 벽면에 벽화가 없는 것이 또한 신라 고분의 특징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 있어 묘제의 발달은 장시의 왕릉들에 대한 조영에서 가장 완비된 단계에 도달하였다. 이 왕릉들의 외형은 다른 분묘들과 한눈에 구별될 수 있는 특수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묘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 묘에 여러 가지 장식을 갖춘 것이 특징인데, 비각을 세우기도 하고, 석인(石人), 석수(石獸) 등으로 신도(神道)를 장식하고 무덤 주위에는 호석(護石 - 둘레석)과 석란(石欄 - 돌로 만든 난간)을 두르고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배치하는 등 호화롭게 꾸몄다.

출처 : 한국관광공사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형태

왕릉의 외부 형식에 따라 1) 아무 석물이 없는 봉토 분 2) 봉토 기단에 자연석을 군데군데 돌린 것 3) 봉토 하부에 석축을 쌓은 것 4) 봉토 하부에 12 신상을 조각하여 호석으로 돌린 것 5) 봉토하부에 12 지신상 외에 묘 앞에 석인(石人) 등 석물(石物)을 배치한 것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러한 형식은 고려, 조선의 왕릉에까지 계속 이어지는 한국식 왕릉의 시작이 된다. 한편 문화는 불교문화가 중심이기 때문에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는 화장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사를 후히 지내는 풍습은 점점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왕릉 이외에는 봉분도 없는 것이 많이 생기고 골호(骨壺)가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그 당시의 풍습을 짐작케 한다. 골호는 그대로 땅속에 묻기도 하나 지하에 돌로 석관을 짜고 그 안에 골호를 넣기도 하고 골호가 들어 있는 다듬은 석함(石函)을 지하에 묻는 방법을 쓰기도 하였다.


※참고 1) 문무대왕릉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되어 대왕암이라 불리고 있다. 이곳은 경주 동쪽 감포 앞의 해변에서 약 200m 떨어진 작은 바위섬이다. 대왕암 위에서 보면 가운데 비교적 넓은 공간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들고나게 되어 있다. 그 공간의 수면 아래에는 길이 3.6m, 너비 2.8m, 두께 0.9m의 크고 넓적한 화강암이 남북으로 길게 놓여있다. 
※참고 2) 골호 : 불교식 화장을 한 후 뼈를 담는 항아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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