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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장례 문화

장례

by 토니모니 2023. 5. 25.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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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장례 문화

신라 가야지구의 큰 봉토분, 즉 고총의 발생은 실질적인 왕국의 출현과 때를 같이하고 잇는데, 그 시기는 3세기말에서 4세기 초 경으로 보인다. 국력의 신장이 확대되는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진 경주 고분은 언덕을 이용하여 그 정상부에 무덤을 마련한 자연 분구묘로 고분 봉토의 거대한 효과를 기대한 것으로서 이 시기를 시작으로 거대한 봉토분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봉토의 거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고분들은 평야지대로 내려와 신라의 특징적 고분인 대형 적석 목곽분이 만들어지게 된다. 한편 이 시대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사람이 죽으면 널을 쓰고 염습을 해서 장사를 지내고 무덤을 만든다. 왕이나 부모, 처자가 죽으면 1년 동안 복을 입는다."라고 하였고,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사책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인력을 수고롭히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임종 후 열흘이 되면 왕궁 밖 뜰에서 불로 태워 장사 지내고 상복을 입는 경중이야 규례가 있을 터이나 장례 절차는 힘써 검약하게 하라."라고 했으며, 또 문무왕에 대한 기록을 보면 "시호를 효성이라 하고, 유언한 대로 법류사 남쪽에서 불사르고 유골은 동해에 뿌렸다."라고 전한다. 이들 기록으로 보아 시신을 염습하여 치장(治葬)을 하고, 복을 이는 복제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 시기에 불교의 법식에 따라 일반인들도 화장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고, 많은 골호들이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장을 한 후 뼈를 항아리에 담아 묻는 매장 법이 유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골호들은 지하의 얕은 깊이에 아무 구조 없이 발견되기도 하고, 두껍고 큰 항아리 속에 골호를 넣은 것도 있으며, 석실묘의 내부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경주시내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적석목곽분은 삼국시대 신라 묘제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데, 구조상으로 복장용 석실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고구려, 백제, 가야 묘제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 4세기부터 6세기 전반까지 조영 된 대형의 적석목곽분들은 지하에 광을 파거나 혹은 지상에 목곽을 짜 놓고, 그 속에 목관과 부장품을 안치하고 목곽의 주위와 위를 돌로 덮은 다음 봉토를 씌운 것으로 경주지방 고신라의 특색 잇는 묘제이다. 이러한 적석 목곽분은 외관이나 내부 매장시설 등에 따라 대체로 세 종류로 나눈다.

1) 한 봉토 안에 매장 시설이 하나만 있는 단관식(單槨式)이 있다. 경주 시내에 있는 대형고분들은 주로 단곽식으로서 금관총, 금령총, 천마총을 들 수 있다.

2) 한 봉토 안에 여러 개의 매장시설이 있는 다곽식(多槨式)이 있다. 다곽식 중에는 2~6개의 매장 시설이 들어있으나 황호동 16 고분처럼 16개의 매장 시설이 있는 경우도 있다. 다곽묘는 가족묘로 백제나 고구려 고분같이 묘실이 있어 출입이 용이한 형식이 아니기 때문에 고신라에서는 주인공 사후에 가족들이 동일 봉토 안에 매장할 수밖에 없어 이러한 다곽묘가 새겨난 것으로 보인다.

3) 봉토를 잇대어 외형이 낙타등이나 표주박을 잘라 놓은 형태를 한 표형분이다. 일명 쌍분(雙墳)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고신라에만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적석목곽분은 구조의 특이성 때문에 추가장이 안되는 단곽묘와 합장 또는 추가 매장을 할 경우 같은 봉토 안에 여러 개의 목곽을 배치하거나 바로 옆에 붙여서 또 하나의 봉분을 축조하는 경우 표형분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황남대총이 대표적인 표형분으로서 남분이 먼저 축조되고 그 후에 부인 묘인 북분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적석목곽분의 특징은 내부에 부장품을 넣는 것인데, 이는 내부가 냇돌로 쌓은 적석부이므로 도굴이 어려워 부장품이 그대로 남아 있는 점이다. 이밖에도 신라의 무덤으로는 목곽묘, 적석목곽묘, 석곽묘, 옹관묘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무덤이 섞여 나타나며, 화장묘도 나타난다. 이러한 양식들은 신라지역 외에서도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신라의 전형적인 묘제는 적석목곽분이라 할 수 있겠다.

이렇듯 삼국시대에 다양한 묘제와 더불어 염습이란 말과 함께 죽은 사람에게 수의 개념의 복식에 대한 기록이 문헌에 나타나며 초종이나 상복 입는 기간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부터 사회적으로 상장례의 절차가 정비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동천왕(248년)때 순장법(殉葬法)을 금지시켰고, 신라는 6세기 초에 가서야 순장법을 금지하고 상복법(喪服法)을 정하였으며, 백제도 고구려와 비슷한 시기에 상복제도를 제정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상례절차에 따른 수의와 상례복식이 사용된 것은 영혼불멸이라는 계세사상의 영향으로 시작된 것이라 생각되며, 이것이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것은 순장법이 사라지면서부터라고 본다. 낙랑과 고구려, 백제의 묘제에서 나타나는 죽음에 미리 대처하여 예를 갖추었으며, 가치를 가지고 있는 물건을 무덤에 넣어 후장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을 위한 예(禮)뿐만 아니라 조상숭배 의례로 볼 수 있고, 저승의 공간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는 저승에서의 생활에 대한 관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문헌에 기록으로 나타나기 이전부터 죽음에 대한 예를 행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에는 이미 기본적인 상장례 절차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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