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고구려 장례 문화

장례

by 토니모니 2023. 5. 2. 20:35

본문

728x90
300x250

삼국시대 중 첫 편으로 고구려 시대 장례 문화에 대해 알아볼게요.

[해(삼족오) 고구려 고분 벽화]

 

※ 출처안내
이 저작물은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저작물(작성자 : 토니모니)을
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립문화재연구원 누리집(www.nrich.go.kr)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이(가) 개방한 전통문양 검색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수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장례 문화

고구려 시대의 기록(삼국지 동이전, 고구려 편)을 살펴보면

남자와 여자가 혼인만 하면 벌써 장사
지낼 때 입을 옷을 장만한다.
그리고 장사는 금, 은, 돈, 폐백 같은 것을 후하게 써서 장사를 지내며,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봉분 앞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많이 심는다.
라고 하였다.

또 다른 북사(北史) 고구려전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집안에 빈소를 만들고
삼년을 지낸 다음에 길일을
가려서 장사 지낸다. 

부모나 남편이 초상에는 삼 년 동안
복을 입고 형제간에는 석 달 동안 입는다.

초종을 치를 때는 모두 곡하고 울지만
장사 지낼 때에는 춤추고 음악을 하며
죽은 사람을 보낸다.

"장사가 끝나면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 입었던
의복과 거마를 무덤 곁에 놓아두었다가
장사에 모인 사람들이 나누어 집어 가지고 간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혼인 후 수의(壽衣)를 마련한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인에게 예를 갖추어 치장(治裝)을
한 것으로 보이며, 장례기간이 나타나 있는
것으로 보아 중국의 영향으로 유교적 상장례와 상복제도를 받아들였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혼인하면서부터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하고 후장한 것으로 보아 저승에서의 존재를
인정하는 등 저승관념과 사생관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었다는 것은
적석총(積石塚)을 말하는 것이며,
봉분 앞에는 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조상숭배에 대한 내용이며,
오랜 기간 동안 집안에 빈소를 모시는
것으로 볼 때는 이차 장일 가능성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의 고분

고구려의 고분은 수도의 변천에 따라 접안현
퉁구를 중심으로 한 압록강 중상류 유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이 밖에 안악 주변에서도 벽화고분의 유존(遺存)이 알려져 있다.
 
고분은 대부분 강변의 낮은 대지에 이루어지거나
산을 등지고 넓은 들을 낀 언덕위에 조성된다.
고분은 분구의 축조형식에 따라 석총(石塚)과
토총(土塚)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특히 고구려 전기에는 적석총이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였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봉토분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1) 적석총(積石塚)

고구려 고유의 묘제는 적석총이었다.
고구려 건국 초기부터 조성되어온 무덤으로
압록강의 만주 쪽 지류인 훈강과 한국 쪽 지류인
독록강 유역에서 평양 지방에 이르는 여러 지방에
퍼져 있으며, 5세기 이후로는 봉토분이 주로 축조되었지만 고구려 말까지 존속하였다.
 
초기 적석총은 강변의 평지에 하천석을
방형으로 깔고 그 위에 관을 놓은 후
다시 하천석을 덮은 것이었으나, 점차 강가의 모래땅에서 더 육지쪽의 대지 또는 산기슭으로
터를 옮기고, 냇돌 대신 자른 할석을 써서 벽이 무너지지 않게 계단식으로 쌓아 올려 구축하였다. 
 
석총의 외형은 주로 방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내부에 시체를 매장하기 위한
시설로는 수혈식 석곽을 만들었고,
그 묘실 바닥은 지표면 보다 높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적석총은 남러시아 지방에서부터
시베리아에 걸쳐 널리 퍼져있는데,
이것이 남하하여 고구려 고분의 발생에 영향을 주었다고 예측해 본다. 
 
3세기말이나 4세기 초가 되면 중국계 석실분의
영향을 받아 퉁구지방에서도
적석총의 중심부에 갱도가 달린 석실을 만들게 된다.
일부 지배계층의 적석총에 들어있는 석실은 부부를 합장하기 위해 쌍시로 만든 것이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장군총, 태왕릉, 천후총 등이다.
이들 적석총은 5세기 전반 평양 천도 이후 차츰 쇠퇴하여 자취를 감추게 된다.
 

(2) 봉토분(封土墳)

가) 봉토분이란
갱도를 갗춘 횡혈식 석실을 지상 또는 반지하에 축조하고,
그 위에 흙과 돌무지, 진흙, 숯, 재 등을 깐 뒤 흙으로 덮어서 분구를 축성한 구조형식의 분묘이다. 
봉토분의 분구 형식은 적석총처럼 머리 잘린 피라미드형을 이루고 있으나 강서군 삼실총처럼 원형인 것도 있다. 
 
나) 봉토분 묘실의 구성
나-1) 관을 안치한 현실에서 외부로 통하는 갱도와 현실로 이루어진 단실묘(單室墓)
나-2) 갱도 전실, 통로, 현실로 이루어진
이실묘(二室墓)
나-3) 갱도 전실 및 전실 좌우에 달린 측실, 통로, 한실로 이루어진 다실묘(多室墓) 등으로 나뉜다.
또한, 갱도가 묘실의 중앙에 달린 것, 좌우에
편재한 것 등이 있다.
 
다) 석실의 벽면
할석(깬 돌) 등으로 구축한 후 그 벽면에다 석회를 발라서 완성한 것을 원래의 수법으로 삼고 있으나, 말기에 와서는 강서구의 삼묘(蔘墓)와 같이
네모반듯하게 가공된 큰 판석을 세워서 묘실을 구축하였다. 
벽면은 수직으로 쌓아 올린 것과 곡면을 이룬 것이 있는데, 이러한 벽면 처리의 두 형식은 축조 재료의 제약을 어느 정도 받고 있음과 동시에 천정가교와
어느 정도 유기적인 관련을 갖고 있다.
 
라) 천정
천정에는 납작천정, 활천장, 모임줄천정 등이 있는데  특히 후자는 천정 네 귀에 삼각형으로 받침돌을 놓아 그 공간을 점차 좁혀 올리고 맨 위에 판석 한 장을 올린 것으로 고구려 고분만이 갖는 구조적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봉토분은 낙랑이 멸망하고 고구려 귀족들이 평양지방으로 진출한 서기 4세기 전반부터 요동지방에 있던 중국계 봉토분의 영향을 받아 발생한 것으로
427년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뒤부터는 이 무덤의 양식이 주류를 이룬다.

[기린(麒麟) 고구려 고분 벽화]

※ 출처안내이 저작물은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작성하여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저작물(작성자 : 토니모니)을이용하였으며, 해당 저작물은 국립문화재연구원 누리집(www.nrich.go.kr)에서 무료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국립문화재연구원이(가) 개방한 전통문양 검색 저작물은 공공누리 제 1유형 "출처표시" 조건에 따라 이용할수 있습니다.

고구려 전기 고분

350년 ~ 450년쯤의 고분으로는 평면의 좌우에 측실이 달려있고, 옆으로 긴 방형의 현실이 달린 T자형의 형식이다.
그림의 벽면은 벽면에 회칠을 하고 마르기 전에 주·황·녹청·황토 등 광물질 물감과 먹으로 윤곽을 그린 후 안료로 채색하는 방법으로 그렸다. 
그림의 주제는 안악 3호분인 동수묘와 덕흥리 분묘에서 볼 수 있는 부부초상, 사냥, 행렬, 실내상황 장면 등을 담은 인물 풍속도가 주로 보인다.
 
고구려 중기 고분
450년 ~ 550년쯤으로 이 시기의 고구려는 전성기에 해당되며 전기와 마찬가지로 용강과 퉁구지방에 분포하고 있다. 중기 고분의 구조는 이실형(二室形)이면서 전기에서처럼 옆으로 긴 전실의 길이가 짧아지면서 측실이 없어져 현실의 그것과 같아지는 특징이다.
따라서 평면은 T자형이 아니라 여(呂)자형(字形)이 된다. 
이는 측실이 달린 중국식 전통에서 고구려 식으로 정착하면서 전실이 작아져 부실처럼 되고,
주인 내외의 초상도 주실의 북면으로 옮겨졌다. 
그림의 주제는 전기와 같이 부부를 주제로 하고 있으나, 신상(神像)식의 정좌상이 아닌 어떤 생활 장면의 주인공으로 다루어져 있고, 나머지 벽면 역시 생전의 기록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문자 그대로 풍속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시기 후기에는 사신도가 주제로서 새로 나타나며 인당초문을 비롯해서 불교장식 무늬도 나타난다. 
벽화 내용으로 보아 불교사상이 크게 반영되는 것도 중기 고분벽화의 특색이다.
 
고구려 후기 고분
550년 ~ 650년 쯤의 고분은 구조적 단실묘가 대부분이며 갱도가 남벽 중앙에 열리는 모 자형(字形)이고 현실 바닥이
지하가 아닌 지상에 놓인다. 이 시기의 무덤은 집안 사신총, 호남리 사신총, 진파리 1, 4호분 등이다.
벽화의 내용은 사신도 일색이며 사신도 배경에는 나무, 구름 등의 사실적인 것 이외에도 해와 달,
북두칠성 등의 일(日), 월(月), 신선(神仙), 성신(星辰) 등의 도교적 요소가 많아지고 있다.
이 시기 벽화 고분의 특색은 힘찬 선과 화려한 색채를 띠고 있는 점이다. 
 

고구려 고분의 특징

이상 고구려 고분을 개관하면 재래식인 적석총, 중국계의 봉토분을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평지무덤이라는
데서 경주의 적석목곽분과 같으나 복장묘(複葬墓)라는 데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또, 봉토분에서는 방대형의 봉토, 측실이 있고 전후로 연결되는 묘실의 구성, 벽화장식 등 중국 특히 한대묘제의
영향을 받고 있으나 5세기 이후에는 구조, 벽화 양면에서 고구려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다.

 
 
 
1편 죽음에 관한 이해
2편 장례의 의미와 기원
3편 삼국시대 이전의 장례
 

300x250

'장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화담숲에 봄 보러 오세요  (25) 2023.05.05
백제 장례 문화  (9) 2023.05.03
삼국시대 이전의 장례  (14) 2023.05.01
장례(葬禮)의 의미와 기원  (0) 2023.05.01
죽음에 관한 이해  (2) 2023.05.01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