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들의 삶과 죽음
고대인들은 삶과 죽음을 단절로서가 아니라 연속으로 보았다.
그들은 유한한 생명의 관념적 연장형태로서의 사후세계를 믿었다.
비록, 육체는 죽더라도 영혼만은 멸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으로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매장하는 데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다.
즉, 시체의 머리를 해가 뜨는 동쪽에 두며, 얼굴을 위로 향하게 하고, 몸은 꼿꼿이 펴서 뉘었다.
그리고 시체의 주위에 돌을 둘려 이를 보호하려 하였고 돌화살촉이나 토기(土器)를
부장(副葬-죽은 이가 생전에 사용하던 물품을 함께 묻음)하여 죽은 뒤의 생활에도 불편이 없게 하려는 배려를 하였다.
동시에 그들은 죽은 자를 슬픔 속에서 보낸 것이 아니라, 춤, 노래, 음악으로 영혼을 위로하여 즐거이 보내기도 하였다.
자손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조상의 영혼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고 믿었던 것이다.
특히, 왕이나 장군의 영혼은 나라를 진호(鎭護_난리를 진압(鎭壓)하여 나라를 지킴. 또는 난리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나라나 마을을 지킴)하고 재앙을 물리치고 환난을 구하는 것으로 믿어졌기 때문에 장례식이나 제사의식은 아주 중요하였다.
고대인들은 사후에 자신의 영혼이 안식할 수 있고, 또한 올바른 조상이 되어 후손과 정상적인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장례의식을 치르고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죽은 자가 장례를 거치지 않고 버려져 있다면, 그 영혼은 방황을 계속하여 산 자에게 어떤 재앙이나 고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고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죽은 자의 매장 불허를 최대의 형벌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매장 불허가 영혼의 안식을 방해하고 고통에 빠진 유가족들이 정상적으로 애도할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발적인 사고나 전쟁에서의 사망 등으로 인하여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버려졌던 시신을 회수하여 장례를 치르는 일은 죽은 자와 관계있는 산 자들이 반드시 해야 할 의무로 간주되었다.
구석기시대부터 초기철기시대까지의 선사시대는 역사적 기록이 없다.
따라서 유적이나 유물, 고분을 통하여 당시으 사상이나, 신앙, 풍습, 사회제도, 장묘방법 등에 관해 살펴볼 수밖에 없다.
이 시대를 전후하여 나타나는 장법들은 주로 거석문화와 함께 돌을 쌓거나 땅을 파서 시체를 묻는 장법이다.
평남 강서군 대성리에 있는 선사시대부터 고구려시대에 이르는 유적을 발굴해 본 결과 변형고인돌, 돌널무덤, 독무덤, 덧널뭠, 돌방무덤, 벽돌무덤, 움무덤 그리고 민무늬토기시대의 주거지 1곳 등이 발견되었다.
움무덤에는 분구가 있는 것과 없는 것, 단장인 것과 합장인 것, 덧널무덤으로 여겨지는 것 등 종류가 다양하다.
한국의 무덤은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청동기시대 이후로 무덤형식이 다양해지고, 역사시대에는 각지에 고분군이 남아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이후로는 껴묻거리가 빈약해지거나 아예 없어져서 고고학에서의 고분 연구 성과는 삼국시대의 무덤형식보다 많이 줄고 있다.
고인돌은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이다. 고인돌의 연구에서는 지하의 묘실구조와 축조방법에 따라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된다.
한민족 형성의 근간을 이루는 예맥족(濊貊族)은 사람이 혹 중한 병을 앓거나 죽는 일이 있으면 그 집을 헐어버리고 새로 집을 지어 살았다고 한다. 이때는 아직 제대로 된 사생관(死生觀)이 생성되기 이전이어서, 그들은 죽은 이를 주거지로 사용하던 동굴 속이나 자연적인 구릉지 등에 간단한 형태의 구덩이를 파서, 흙이나 조개껍질로 덮거나, 혹은 돌을 쌓거나 하는 방법 등을 사용하였을 것으로 유추된다.
또 ,동옥저(東沃沮)에서는 가족공동장을 지냈는데, 그들은 길이 10m쯤 되는 나무덧널의 한쪽에 문을 달아 두고 가족이 죽으면 다른 곳에 임시로 매장하였다가 뼈만 추려서 덧널 속에 넣어두었다. 한 가족을 모두 이런 식으로 장사 지내고, 여기에다 사람 수대로 살았을 때의 모습을 나무로 조각하여 넣고, 문 앞에는 곡식을 담은 토기를 매달아 죽은 사람의 양식으로 하였다. 이때 나무덧널은 가족공동묘의 구실을 한 것으로 유추된다.
부여(夫餘)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곽(槨)은 있어도 관(棺)은 없다" 고 했으며, "사람을 죽여 순장(殉葬) 시키는데 숫자가 많은 자는 백 명이나 되었다. 또 임금이 죽으면 옥갑에 넣어 장사 지낸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거상(居喪)하는 데는 남녀가 모두 흰옷을 입고 여자는 목걸이나 패물을 떼어 놓는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시체를 다섯 달 동안 집에 두는데 오래 둘수록 좋은 것으로 여긴다라고 하였다.
곽(槨)이란 관(棺)을 담는 외곽을 의미하지만 석실묘나 돌널무덤을 말할 때도 쓰이고 있다.
긴 네모꼴의 구덩이를 파서 돌덩이나 깬 돌로 네 벽을 쌓고 그 위에 몇 개의 뚜껑돌을 덮은 것으로 천정을 좁히기 위해 벽 위에 굄돌을 얹거나 벽을 오므린 것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 문헌에서 나타나는 후장(厚葬)과 순장을 통해 당시의 저승관념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죽은 자를 위한 의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상복의 의미를 가진 옷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고인을 기준으로 한 가족관계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조상에 대한 인식과 숭배사상도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죽은 자에 대한 의례행위는 고대적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의례 행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가치있는 죽음, 존엄한 죽음에 대해 고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백제 장례 문화 (9) | 2023.05.03 |
---|---|
고구려 장례 문화 (26) | 2023.05.02 |
장례(葬禮)의 의미와 기원 (0) | 2023.05.01 |
죽음에 관한 이해 (2) | 2023.05.01 |
고혈압 환자 약 치료 운동 음식 (1) | 2023.05.01 |